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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의 미술 이야기
2008/04/23 17:24 in 2008봄학기ToT프로젝트/ON GOING | Tags: On going, 오드리의, 이것은미술이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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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의 미술이야기①
-이데올로적 관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어린 시절, 가장 먼저 브라운관을 통해 보게 된 세상은 어떠했을까? 나에게는 ‘디즈니’의 인어공주가 보여줬던 세상이 떠오른다. 동생을 분홍색 포대기에 업고 상영시간에 늦지 않게 내 손을 꼭 잡고 티켓팅을 하던 엄마를 기억한다. 늦어서 급한 발걸음으로 걸어갔지만 한 손으론 날 잡고 다른 손으로 업힌 내 동생을 붙잡고 있던 엄마가 빠르면 얼마나 빠를까. 당연히 늦어서 헉헉대며 제일 꼴찌로 들어갈 수밖에. 묵직한 영화관 문도 처음 봐서 어떻게 열어야 되는 건지 순간 두려웠는데 엄마는 능숙하게 문을 열었다. 2시간동안 환상적인 화면에 내 눈은 젤리처럼 말랑거리고 가슴은 무척 두근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으로 무언가 보고 두근거린 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서 어쩐지 슬픈 거 같기도 하다. 남들과 다르지 않았던 유년의 경험이 서운했던 걸까? 아니면 나에게 인어공주를 보여주기 위해 헉헉대며 갔던 엄마가 생각나서 일까.
엄마는 왜 그 애니메이션을 보여주고 싶어 했을까. 그 뒤로도 나는 인어공주를 엄청 나게 좋아했고, 나의 미의 기준엔 흰 피부의 금발머리 신데렐라 보단,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빨간 머리 인어공주가 자리 잡았다(사실 그게 그거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나같이 어릴 적 시각적 두뇌활동을 디즈니로 시작하는 아이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지. 유치원에서조차 디즈니에 나오는 공주님같이 생겨야 ‘예쁜 애’라고 취급해 줄 텐데, 공주님 축에 끼지 못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열등감으로 어린 시절을 시작할지도 모를 텐데.


여기 신디 셔먼의 1981년 작 <무제 영화 스틸>을 보자. 신디 셔먼은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관습’에 주목한다. 우리가 자주 보는 영화와 대중매체 속에서 관습적으로 보여 지는 여성의 이미지를 포착하여, 자신이 직접 등장해 재현하는 작업을 했다.
여기서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잠깐 설명해보자. 위에서 말한 나의 경우처럼, ‘슈렉’ 이전의 디즈니 만화를 세상의 많은 내 또래 아이들이 기어 다닐 때부터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속에 등장하는 ‘공주’를 보며 공주님이란 서구의 기준에 맞춰진 ‘아름다운 외모’를 한 여자라고 알게 된다. 한마디로, 권력을 가진 문학 텍스트 혹은 시각적 재현물들이(ex.디즈니) 세상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실제를 왜곡하거나 부풀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재생산하여 차츰 보편화시킨다. 이러한 인식작용을 이데올로기적 관습이라 하는데, 신디 셔먼은 여성에게 강요되는 이데올로기적 관습을 폭로하고자 <무제영화 스틸>과 같은 작품을 제작한다.
이미지는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우리의 삶과 의식이 이미지들에 의해 영향 받고 규정된다. 그리고 신디 셔먼의 작품들은 이러한 우리들의 시각적 경험을 파고들면서 무엇을 볼 것인가를 질문한다.
또 하나의 예를 보자.


ugh with His Wife and Elder>1751-2
낭만파 초상화가로 알려진 게인즈버러의 <Thomas Gainsborough with His Wife and Elder>는 남녀로 이뤄진 부부와 어린 딸, 애완견으로 ‘이상적인’ 가족구도를 보여준다. 영국의 왕실화가였던 게인즈 버러의 작품엔 대부분 단란한 왕가의 일상이 풍경과 함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일종의 ‘가족’에 대한 판에 박힌 인식은 ‘왕실’이 아니어도 현재 우리의 삶 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가족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총선에 참여한 평화통일가정당의 홍보영상은 ‘보편적인’ 4인으로 이뤄진 가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이러한 구조를 가지지 못한 가족들을 배제하고, 어떠한 ‘허상’을 끊임없이 ‘실제’이며 ‘규범’이라 강요함으로써 우리의 ‘가족구조’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과 상상력을 제한하게 된다.
다시 ‘공주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실비아 슬레이 <The Turkish Bath>1973
여기 두 점의 작품이 있다. 터키탕 안의 여성들을 담은 앵그르의 1862년 작 <The Turkish Bath>와 동일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실비아 슬레이의 1973년작 이다. 앵그르의 작품에서 이 터키탕의 여자들은 죄다 젊고 아름다우며 요염하다. 대중목욕탕, 혹은 찜질방에 갔을 때 ‘아름다운’ 여자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더군다나 여탕 마루에서 벌거벗고 주무시는 아주머니들이 요염한 포즈를 취했던 적이 있나? 동그란 프레임안의 여자들은 마치 누군가에게 엿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어느 한 명도 이 훔쳐보는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관음증적 시선 아래서 여성들은, 요염하게 ‘보여 지고’ 있을 뿐인 이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여성의 몸은 젊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과,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만이 ‘자연스럽다’고 느끼게 될 뿐 아니라, 이들은 늘 ‘보여짐’의 ‘대상’이어야 할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실비아 슬레이의 <The Turkish Bath>는 이러한 관습에 반기를 든다. 아름다운 여인들 대신 털이 북슬북슬한 남정네들이 등장한다. 그다지 성스럽거나 아름다운 몸도 아니고, 멋진 외모도 아닌 ‘남자’들이, 전혀 요염하지 않은 자세로 앉아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을 향해 똑바로 시선을 두고 있다. 누드는 아름다운 여성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던 우리는, 군더더기 없는 남성의 누드와 마주쳤을 때 어쩐지 당혹감을 느낀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들이 깨지는 순간 우리는 어떤 ‘당혹감’을 느끼게 되는데, 실비아 슬레이는 이러한 당혹감을 관객에게 선사함으로써 마치 관습적 이데올로기가 산산조각 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발하는 듯하다.
우리는 유년기에 디즈니를 통해 공주의 이미지를 접한다. 그 속에서 항상 주인공인 공주는, 당연히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젊은 여자(거기다 ‘착한’)였다. 그리고 그 공주의 이미지는 자신 혹은 타인에게 열등감 주게 된다. 이처럼 이미지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함정은 곳곳에 포진해 있다. 미술은, 혹은 미술의 언어는 그 함정들을 찾아내는 통찰력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이미지란 단단하게 구현되는 것이 아닌, 해체하고 돌파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돌파했을 때 맞닥뜨린 당혹감이야말로, 어쩌면 ‘명쾌한 해답’으로 진화할 수 있는 미술언어의 자기 쇄신 능력은 아닐까?
찾아보면 좋을 자료들: <여성, 미술 이데올로기>,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다음 회에서 예술가의 신화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Audrey(열린 작업장 ToT) / Hidoori@gmail.com
08.03.15 ON GOING 회의.
2008/03/15 14:21 in 2008봄학기ToT프로젝트/ON GOING | Tags: On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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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15.토
오드리: ON GOING에서 함께 하자고 한 카툰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카툰의 방향성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함께 이야기 해보자. 그리고 ON GOING안에서 또 다르게 해 볼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지 생각해 보자.
새삼: 우리의 스터디를 조금 정리해서 칼럼으로 썼으면 좋겠다.
오드리: 다른 팀에서 하고 있는 공부도 공유가 잘 안되고 있다. 우리가 해보면 좋겠다. “새삼의 쉽게 쓰는 미술사”라던가. 그런데 카툰은 다들 하기로 확정 한 건가요?
제이: 어제도 글쓰기 팀과 이야기를 했다. 확정된 것 같다.
새삼: 글쓰기 팀에서 천천히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떤 성격의 카툰을 할 것인지 차차 이야기 해보자 라고 이야기 했어요.
오드리: 카툰의 방향은 어떻게 잡는 게 좋을까요? 소식만을 전달하는 카툰을 만들어도 좋겠다.
센: 이미 웹진에서 소식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재미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 우리가 스터디 하는 내용을 만화로 담는 건 어떨까요?
새삼: ‘먼 나라 이웃나라’처럼. 아니면 하자의 소소한 일상을 만화로 담아보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오드리: 비주류 만화 보셨어요? 여러 매체를 이용한 카툰처럼, 우리도 꼭 한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그리는 게 아니라 매번 역할을 달리하며 카툰을 진행해보는 게 어떨까요. 주인공이나 이야기는 같지만 스타일만 달라지는 릴레이 카툰.
새삼: 달마다 달라지면 제목도 다르잖아요. 등장하는 캐릭터도 다를 것이고. 카툰의 제목을 정해달라는 이야기를 하던데, 카툰 코너 이름을 구지 정하는 것이 좋을까요?
오드리: 일단 기획과정이니까 테디, 달갱하고 이야기 해보는 게 어떨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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